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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창작의 시작 – 디자인 구상부터 조각까지

5.1. 리노컷을 위한 디자인: 흑과 백의 사고

리노컷은 더하는 예술이 아닌, 빼는 예술이다. 즉, 판의 표면을 조각칼로 ‘제거’함으로써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감산법(subtractive process)에 기반한다. 이는 연필로 흰 종이에 검은 선을 그리는 일반적인 드로잉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한다. 리노컷 작가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파내어진 부분은 종이의 흰색으로, 파내지 않고 남겨진 부분은 잉크의 검은색으로 나타날 것을 상상하며 작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거티브 공간(negative space)’에 대한 이해는 성공적인 리노컷 디자인의 핵심이다.

또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이미지의 ‘좌우 반전’이다. 판에 새긴 이미지는 종이에 찍혔을 때 거울처럼 좌우가 뒤집혀 나온다. 풍경이나 대칭적인 디자인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글자나 특정 방향성이 중요한 비대칭 이미지의 경우, 반드시 디자인을 좌우로 뒤집어서 판에 옮겨야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쉬운 확인 방법은 스케치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뒤, 사진 편집 앱에서 좌우 반전 기능을 사용해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최종 인쇄될 모습을 미리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5.2. 디자인 옮기기: 다양한 전사 기법

구상한 디자인을 리놀륨 판으로 옮기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며, 각기 장단점이 있다.

먹지/트레이싱지법(Graphite/Carbon Paper Method): 초보자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신뢰도 높은 방법이다. 먼저 트레이싱지(기름종이)에 연필로 디자인을 그린 후, 리놀륨 판 위에 먹지(카본지)를 놓고 그 위에 트레이싱지를 올린다. 그리고 연필이나 뾰족한 도구로 디자인의 선을 따라 다시 한번 그리면, 압력에 의해 먹지의 안료가 판에 옮겨붙는다.
직접 드로잉(Direct Drawing): 연필이나 유성 마커를 사용해 리놀륨 판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이다.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에 적합하지만, 수정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아세톤/솔벤트 전사법(Acetone/Solvent Transfer): 잉크젯 프린터가 아닌 ‘레이저 프린터’로 출력한 디자인을 사용한다. 출력물을 이미지 면이 아래로 가도록 판 위에 놓고, 아세톤이나 네일 리무버를 솜에 묻혀 뒷면을 문지르면 토너가 녹아 판에 전사된다. 빠르고 간편하지만, 사용하는 리놀륨의 종류나 솔벤트의 양에 따라 결과가 일정하지 않을 수 있다.
아크릴 미디엄/접착제 전사법(Acrylic Medium/Glue Transfer): 다소 과정이 복잡하지만 가장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레이저 출력물의 이미지 면과 리놀륨 판 양쪽에 아크릴 겔 미디엄이나 PVA 접착제를 얇게 바른다. 두 면을 기포가 생기지 않게 잘 붙인 후 완전히 건조시킨다. 그 다음, 물을 묻혀 종이 부분만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제거하면, 토너로 된 이미지만 판에 남게 된다.

5.3. 조각의 기본: 안전과 올바른 자세

리노컷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조각칼은 매우 날카롭기 때문에, 잘못 다루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다. 다음의 안전 수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가장 중요한 원칙: 조각칼은 항상 몸 바깥쪽 방향으로, 그리고 칼날 진행 방향에 다른 손을 두지 않은 채 사용해야 한다. 칼을 쥔 손의 반대편 손은 항상 칼날의 뒤쪽에 위치해야 한다.
판 고정하기: 조각 중에 판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벤치 훅(bench hook)이라는 안전 장치를 사용하거나, 판 밑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까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양손을 자유롭게 하여 조각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올바른 자세: 조각칼의 손잡이 끝부분을 손바닥 중앙에 대고, 검지를 칼날의 쇠 부분에 길게 뻗어 방향을 잡고 지지한다. 손목의 힘만으로 파내려 하지 말고, 팔 전체와 체중을 실어 안정적으로 밀어내는 것이 더 부드럽고 제어된 선을 만드는 비결이다.

5.4. 선과 질감 만들기: 마크 메이킹 기법

안전 수칙을 숙지했다면, 이제 다양한 표현을 위한 조각 기법을 익힐 차례다. 조각을 시작하기 전에 유성 마커나 묽게 희석한 아크릴 물감으로 판의 표면을 어둡게 칠해두면 좋다. 이렇게 하면 조각칼로 파낸 하얀 부분이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어 이미지를 훨씬 명확하게 확인하며 작업할 수 있다.

선의 굵기 조절: 특히 V자형 칼을 사용할 때, 칼의 각도를 조절하여 선의 굵기를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다. 손목을 들어 칼을 가파르게 세우면 깊고 굵은 선이, 손목을 내려 칼을 눕히면 얕고 가는 선이 만들어진다.
곡선 표현: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 때는 칼을 쥔 손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 손으로 판 자체를 천천히 돌려주면서 조각한다. 이렇게 하면 훨씬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곡선을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질감 표현: 조각칼의 종류와 사용법을 응용하면 다채로운 질감을 만들 수 있다.
- 점: U자형 칼을 비스듬히 살짝 찔러 넣었다 빼는 동작으로 점을 찍을 수 있다.
- 반원: U자형 칼을 45도 각도로 찔러 넣은 후, 칼을 들어 올려 파낸 조각을 부러뜨리면 반원 모양이 생긴다.
- 별 모양: 큰 V자형 칼을 사용하여 별의 각 꼭짓점에서 중심으로 향해 파내면 만들 수 있다.
- 채터(Chatter): 칼날을 표면에서 살짝 튕기듯이 빠르게 움직여 거칠고 무작위적인 질감을 표현할 수도 있다.